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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1. 11世 〉6. <부정공>학생공휘철석행록(學生公諱哲碩行錄)
1. 문헌 목록 〉11. 11世 〉8. <부정공>통사랑예빈시참봉무송공휘무묘갈명(通仕郎禮賓寺參奉撫松公諱懋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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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정공>수의부위훈련원봉사공휘각묘갈명(修義副尉訓鍊院奉事公諱珏墓碣銘)
修義副尉訓鍊院奉事公諱珏墓碣銘 賢者之喪親也無所不用其哀徑其情則多死先生王爲之立禮而全安之然繭繭也梅梅也欒欒也存者僅耳加之前痛未艾後創又巨者耶此奉事趙公之所以死也嗚呼惜哉公諱珏字伯榮登 萬曆三十一年癸卯武科以奉事在京明年聞父計又明年見母喪公雖武夫乎自幼愉婉讀書之賢者也家世仕宦且親年康健求祿以爲榮雅志也星還痛悔如大罪幾不欲生哭輒頓絶賴母夫人強之自力水飲至乙巳十月則嬴悴己凛綴而母夫人又患泄痢矣求藥萬方寝食不以時袒括猶勤禮不懈哭聲通晝夜無一時息疾己作枕上涕常滿竟以丙午二月十一日卒噫方前喪固後喪不料哀毀如禮僅能免死及後喪去前喪未遠哀毀如禮亦足致死奉事公之死考歟奉事公之死孝也公淳昌人鼻祖高麗侍中諱璋歷二世諱元吉號農隱與鄭圃隱共靖王室官侍中封玉川君諡忠獻生諱瑜時人不知通喪之制百日即吉獨居三年親負土而葬 太祖龍興徵不應命隱虔谷而自號 太宗曰前副正趙瑜有採薇之志 世宗命給守塚三戶且旌其孝漢湖金文敬公所撰墓表具載其事而近日宋祭酒秉璿亦作碣銘至孫縣監諱智崑四兄弟築相好亭而處孝義著于世寔公高祖也曾祖諱和司直祖諱介臣監察考諱大承泰仁縣監縣有去思碑妣朔寧崔氏參奉康濟外祖宣廟戊寅十二月五日公生磊落不群如汗血墮地有千里志未弱冠識者或稱公輔器雖好讀書恥爲拘儒發軔虎榜司果龍驤若將追跡古之方召矣年止二十九他無得以述焉配宜人泰仁許氏參奉縉女同葬住巖面皷巖洞壬坐原一子義吉通德郎二女安時稷金弘運妻孫時耈時鼎曾孫維春維夏維憲維城至今十世本支多佳士余所識者洪根亮根炳寬炳箕昔人以終喪不入妻室爲漢世武夫之美事而若公之自盡乎哀戚又未聞於漢人者感悌悦服又不獲辭於洪根之請謹爲之銘銘曰兒欲祿養親則不留終天未訣萬死罪浮奔星餘怯命存如縷母也忽焉乂裂肺腑天實爲之公奈禮防其嬴何病其毀非傷赳赳武夫肫肫孝子皷巖之原實瘗衣履載辭貞珉以昭人紀 高靈 申得求 撰 農山 수의부위훈련원봉사공휘각묘갈명(修義副尉訓鍊院奉事公諱珏墓碣銘) 현명한 사람이 친상을 당하여 그 슬픔이 다하면 죽는 사람이 많으므로 선왕(先生)께 서 그런 사람을 위하여 예법을 정해 안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음성이 가늘고 안색이 침울하며 형용이 파리해져 살아 남는 자가 얼마되지 않는다. 더구나 거기다가 전상(前喪)의 슬픔이 끝나지 않았는데 후상의 슬픔이 겹치는 자이겠는가? 그래서 봉사(奉事) 조공이 죽은 것이니 아아 슬픈 일이다. 공의 휘는 각(珏)이요 자는 백영(伯榮)인데 만력 三十一년(一六○三)에 무과에 급제하여 봉사가 되어 서울에 있었다. 이듬해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고 또 그 이듬해에 다시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비록 무부(武夫)인 공이지만 공은 어려서부터 안온하게 책을 읽은 어진 사람으로 집안이 대대로 벼슬해 왔고 또 어버이가 강건하심으로 녹을 구하여 봉양하고저 벼슬한 것이 평소의 뜻이었다. 급히 돌아와서 큰 죄를 지은 듯 후회하여 살 마음이 없어 하다가 이따금 기절하니 모부인이 억지로 말려 물을 먹고 살아났다. 을사년 十월에는 이미 몸이 쇠약해졌는데 잇달아 모부인이 또 이질 병환에 걸리자 만방으로 약을 구하고 침식을 제때에 하지 않으면서 옷을 걸메고 예제 지키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 곡하는 소리가 주야로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병이 나자 침상에는 항상 눈물이 가득했는데 마침내 병오년 二월十一일 졸하였다. 아!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어머니 상을 당할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슬퍼하는 것을 예법대로 다하여 겨우 죽음을 면했었다. 그러다 어머니 상을 당한 것이 앞의 상과 멀지 않았으니 슬퍼하는 것을 예법대로 해 죽음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봉사공의 죽음을 효(孝)라 할 것인가? 효이다. 공은 순창인으로 시조는 고려 시중 휘 장이며 二세를 지나 휘 원길은 호가 농은으로 포은 정몽주와 함께 왕실을 도와 벼슬이 시중에 이르고 옥천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이 분이 휘 유를 낳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상례를 몰라 백일이면 복을 벗었으나 유독 三년상을 입고 친히 흙을 져다가 장사를 모셨다. 조선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벼슬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건곡에 숨어 살면서 스스로 건곡이라 호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전 부정 조유는 백이숙제의 마음을 가졌다.」 하였고 세종은 무덤을 지키는 집 三호를 내리고는 그의 효도를 함께 정려하였다. 미호(渼湖) 문경공 김원행이 묘표를 지으면서 이런 사실을 갖추어 수록했고 최근에는 제주(祭酒) 송병선이 역시 묘갈명을 지었다. 손자 현감 지곤에 이르러 네 형제가 상호정을 지어 효도와 의리로 처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는 화(和)로 사직(司直)이며, 조의 휘는 개신(介臣)인데 감찰이며 고의 휘는 대승(大承)으로 태인현감을 지냈으며 태인현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어머니는 삭녕최씨(朔寧崔氏)로 참봉 강제(康濟)가 외조인데 선조 무인년(一五七八) 十二월 五일 공을 낳았다. 공은 용모가 훤칠하게 뛰어난데다가 피땀을 흘려 나라를 위하는 웅대한 뜻을 품었었다. 二十세가 못되어 식자들이 혹 재상감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구차스런 유생(儒生)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무과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사과(司果)와 용양위(龍驤衛)를 거처 장차 옛날의 방·소(方召)를 뒤따를 것이었는데 겨우 二十九세에 그쳤으니 다른 것은 기술할게 없다. 부인 의인(宜人) 태인허씨(泰仁許氏)는 참봉 진(縉)의 딸로 주암면 고암동 임좌(壬 坐)언덕에 함께 장사하였다. 외아들 의길(義吉)은 통덕랑이며 두 딸은 안시직(安時稷) 과 김홍운(金弘運)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는 시구(時耈)·시정(時鼎)이며 증손은 유춘(維春)·유하(維夏)·유헌(維憲)·유성 (維城)으로 지급 十세에 본손과 지손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많다. 내가 아는 사람은 홍근(洪根)·양근(亮根)·병곤(炳寬)·병기(炳箕)이다. 옛날 사람이 상례를 마치도록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한(漢)나라 때 무사의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그런데 공처럼 상을 당해 슬퍼하다가 죽은 자가 한 나라 때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나는 감탄해 마지않으며 또 사양해도 되지 않아 홍근의 청을 받아들여 삼가 명을 짓는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들이 녹을 받아 봉양하려 해도 兒欲祿養 어버이 기다려 주지 않고 親即不留 종천할 때 영결 못한 것 終天未訣 만 번 죽어도 죄 못 벗네. 萬死罪浮 별처럼 달려오다 奔星餘怯 명이 실처럼 위태로웠네. 命存如縷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母也您焉 또 가슴이 찢어지네. 乂裂肺腑 하늘이 하신 일을 天實爲之 공은 어찌 예로 막으려 했나 公奈禮防 야윈 게 무슨 병이 되며 其嬴何病 슬픔 지나쳤다고 또 어떠하랴. 其毀非傷 씩씩한 무부이며 赳赳武夫 지극한 효자로다.肫肫孝子 고암의 언덕은 皷巖之原 실로 공의 무덤 實瘗衣履 사적비에 새겨 載辭貞瑕 사람의 인륜 밝히네. 以昭人紀 고령(高靈) 신득구(申得求)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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